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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 정사, 재실

시랑공파   l   충의공파

* 신도비, 정여

시랑공파   l   충의공파

* 묘 소

시랑공파   l   충의공파

 

 l 서원·정사·재실 (시랑공파)

위계서원

자양정사

용두정

온천정사

경모재

경모당

운곡정사

사인재

성산재

필산재

청계정

탁한재

철산정사

 

 

 

본문

필산재(筆山齋)

   *10世 전적(典籍) 농헌(聾軒) 휘한(諱澣), 11世 호조참의(戶曹參議) 후환(諱環),

     12世 수문장(守門將) 송암(松菴) 휘복(諱福)의 사우(祠宇)

   *소재지: 경남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필산재(筆山齋) 기(記)>

 

파산이씨(巴山李氏)가 고성(固城)의 대족(大族)으로 그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광록대부(光祿大夫) 파산군(巴山君) 휘상(諱尙)이며 공(公)의 구세손(九世孫)인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남원부사(南原府使) 행헌(杏軒) 휘의형(諱義亨)이 입고성(入固城)하여 선생(先生)의 자손(子孫)들이 각처(各處)에 포호(布濩)하며 공(公)의 증손(曾孫)인 십이세(十二世) 송암(松菴) 휘복(諱福)의 자손(子孫)들의 파분지일(派分之一)이 지금 구만면(九萬面) 연동(蓮洞)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송암공(松菴公)이 소시(少時)부터 호매(豪邁)한 지조(志操)를 자부(自負)하고 공부(工夫)와 연참(硏塹)하는 여가(餘暇)로 겸하여 무술(武術)을 습득(習得)하였다. 임진(壬辰: 1592年) 왜란(倭亂)을 당(當)하여 공(公)이 조고(祖考) 농은(聾隱) 휘한(諱瀚)의 분묘(墳墓)를 이장(移葬)하다가 왜구(倭寇)가 졸지(卒至)함에 역군(役軍)이 모두 피산(披散)하므로 公이 친(親)히 부토(負土)하여 성분(成墳)하고, 즉시(卽時)에 동지(同志)인 송장군(宋將軍)과 더불어 개천면(介川面) 연화산(蓮華山) 아래 결진(結陣)하여 복병(伏兵)으로 기공(奇功)을 세워 왜적(倭敵)을 섬륙(殲戮)하여 크게 공(公)을 세워 수문장(守門將)이 되었으나, 난평후(亂平後)에 각건사제(角巾私第)하여 우유(優遊)하다가 종노(終老)하였으나, 선조(宣祖) 을사(乙巳: 1605年) 사월(四月) 십육일(十六日)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에 추급(推及)되어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송암공(松菴公)의 묘소(墓所)는 필두산(筆頭山) 하록(下麓)에 있으니 곧 연화산(蓮華山)의 북지(北支)이다. 그 후(後)로 자손(子孫)이 그 방근(傍近)에 세거(世居)하나 공(公)의 훈업(勳業)이 많이 산일(散佚)되어 묘하(墓下)에 재숙(齋宿)할 장소(場所)가 없으므로 합족(闔族)이 통한(恫恨)하였다. 무자(戊子: 1948年) 춘(春)에 처음 협의(協議)하며 성력(誠力)을 다하여 재사(齋舍)를 창건(刱建)하고 그 산명(山名)을 따라 필산재(筆山齋)라 이름 하였다.

 

공(公)의 십이세손(十二世孫)인 진길(鎭吉)이 그 사실(事實)이 이와 같음을 기록(記錄)하고 당시(當時)에 치력자(致力者)인 진엽(鎭燁)과 간사자(幹事者)인 십일세손(十一世孫)인 경규(敬奎), 형규(亨奎)와 십이세손(十二世孫) 진우(鎭宇)가 병기(竝記)하여, 그 후 사년(四年)인 신묘(辛卯: 1951年) 하(夏)에 형규군(亨奎君)이 진길씨(鎭吉氏)의 고애자(孤哀子) 탁수(鐸洙)와 같이 멀리서 와서 나를 방문(訪問)하고 기실(記實)을 제시(提示)하며 기문(記文)을 청(請)하여 징거(徵據)코저 함으로, 공(公)의 시말(始末)을 관찰(觀察)함에 난중(亂中)에 조고(祖考)의 분묘(墳墓)를 이장(移葬)함은 효(孝)요,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적(賊)을 타멸(打滅)하였음은 충(忠)이니, 충효(忠孝)는 인도(人道)의 대단(大端)함이요. 공(公)이 그것을 다 실행(實行)하였으니 이와 같은 대단(大端)함이 있었고 그의 상세(詳細)함은 기필(期必)코 묻지 않는다.

 

비록 스스로 공(攻)을 말하지 아니하여도 그 책권(冊券)과 증작(贈爵)은 하늘에서 주었으며 비록 후세(後世)에 전(傳)함을 구(求)하지 아니하여도 그 고사(古事)를 역설(譯設)하는 자(者) 연화산(蓮華山) 전투(戰鬪)에서 공(公)이 수립(樹立)한 지경(地境)이 아닌 곳이 없다 하면 공(公)의 후손(後孫)되는 자(者) 생각컨데 또한 가(可)히 유감(遺憾)됨이 없을 것이다.

 

이에 세사(歲事)를 행(行)하여 수연(愁然)히 영령(英靈)의 척강(陟降)함을 보는 것 같이 하며 또한 이에 종족(宗族)이 단합(團合)하며 소장(少長)이 서로 경계(警戒)하여 그것이 혹시(或是)나 소생(所生)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면 내 이씨(李氏)의 필(必)히 유사(有事)함을 알 것이며 비록 불문(不文)이나 낙문(樂聞)하고 이를 위하여 일언(一言)을 기(記)하노라.

 

1951年 신묘(辛卯) 유월(六月) 오일(五日)

문소(聞韶) 김황(金榥) 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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