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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 정사, 재실

시랑공파   l   충의공파

* 신도비, 정여

시랑공파   l   충의공파

* 묘 소

시랑공파   l   충의공파

 

 l 서원·정사·재실 (충의공파)

남강서원

충렬사

추원당

경모재

영모재

부윤공파 재실

선무랑공2파 재실

 

본문

남강서원(南岡書院)

   *소재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소포5길 82

 

<남강사(南岡祠) 기(記)>

 

고려말(高麗末) 공민왕(恭愍王)때에 3원수(元帥)가 있었으니 함안군(咸安郡)의 그 이원수(李元帥)가 곧 그 하나이다. 공(公)의 휘(諱)는 방실(芳實)이요 시호(諡號)는 충열(忠烈)이고 본관(本貫)은 함안(咸安)으로 판도사판서(判圖司判書) 휘(諱) 원(源)의 자(子)로 충열왕(忠烈王) 무술(戊戌: 1298年)에 광려산(匡廬山) 두봉(兜峯) 하(下)인 함안현(咸安縣) 병곡면(竝谷面) 내동리(內洞里) 내곡동(內谷洞: 경남(慶南)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내곡리(內谷里) 내곡동(內谷洞) 두능(杜陵) 구제(舊第)에서 출생(出生)하여, 안공(安公) 우(祐)와 김공(金公) 득배(得培)와 일대(一代)에 *1)훈명(勳名)을 같이 떨치었다. 세상(世上)에 전(傳)하기를 두봉(兜峰)의 원기(元氣)가 산해(山海)사이에 모이고 뭉키어서 거인(巨人)이 출생(出生)하였다고 한다.

 

슬프다 충목왕(忠穆王)때부터 공민왕조(恭愍王朝)에 이르기까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인 원수(元帥)로 *2)절월(節鉞)을 지휘(指揮)하여 우리나라의 수(數)많은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3)좌임(左袵)을 면(免)케 하였으니, 그 *4)풍공위열(豊功偉烈)이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내리고 시가인(市街人)들이 다투어 유자(幼子)에게 먹을 것을 주어 위로(慰勞)함을 보아서도 가(可)히 짐작할 수 있으니 과연(果然) 일방(一邦)의 *5)정간(楨幹)이 되고 백세(百世)의 표준(標準)이 된다는 말이 타당(妥當)하도다. 문종조(文宗朝)에서 특명(特命)으로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하여 *6)영세불망(永世不忘)의 뜻을 보임이 갸륵하고 아름답도다.

 

안공(安公) 우(祐)와 김공(金公) 득배(得配) 양원수(兩元帥)는 다 *7)유허(遺墟)에 향사(享祀)하는 *8)사우(祠宇)가 있거늘 공(公) 만이 홀로 없으니 자손(子孫)이 고단하고 사림(士林)이 *9)미황(未遑)한 탓인가 마음으로 개탄(槪歎)한지 오래였더니 다행(多幸)히 이제 몇몇 자손(子孫)이 성력(誠力)을 다하여 *10)유지(遺址)에 타령(妥靈)의 곳을 만들어 나라의 숭보(崇報)하는 전예(典禮)를 본 받드니 극(極)히 가상(嘉尙)한 일이로다.

 

그 사림(士林)의 열(列)에 있어 흥감(興感)하지 않는 자 뉘가 있으리오 내 비록 늙고 *11)졸문(拙文)이나 광감(曠感)의 회(懷)를 억누를 길 없어 약간(若干)의 글을 써서 후인(後人)의 *12)고람(考覽)에 이바지 하노라.

 

1848년(年) 헌종(憲宗) 무신(戊申) 동(冬)

후학(後學) 성산(星山) 이정억(李廷億) 기(記)

 

 

 

*1)훈명(勳名): 훈호(勳號)> 훈공(勳功)이 있는 사람에 주는 칭호(稱號)

*2)절월(節鉞): 진영(陣營)> 군대(軍隊)가 집결하고 있는 곳. 정치적(政治的), 사회적(社會的)으로 구분(區分)되어 구성(構成)된 집단(集團)

*3)좌임(左袵): 북쪽 미개(未開)한 인종(人種)의 옷 제도가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민다는 데에서 유래함. 미개(未開)한 상태(狀態)를 이르는 말. 왼 섶

*4)풍공위열(豊功偉烈): 몹시 큰 공훈(功勳). 위대(偉大)한 공적(功績). 위대(偉大)한 공로(功勞)를 남긴 사람

*5)정간(楨幹): 담을 쌓을 때에 양편에 세우는 나무 기둥이라는 뜻으로, 나무의 으뜸이 되는 줄기. 사물(事物)의 근본(根本)을 이르는 말

*6)영세불망(永世不忘): 영구(永久)히 잊지 아니함

*7)유허(遺墟): 오랜 세월(歲月)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역사(歷史) 어린 곳

*8)사우(祠宇): 신주(神主)를 두기 위(爲)해 따로 지은 집

*9)미황(未遑): 미처 여가(餘暇)를 얻지 못

*10)유지(遺址):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자리

*11)졸문(拙文): 변변치 못한 서투른 글 못 지은 글. 자기(自己)의 글을 겸손(謙遜)하여 이르는 말

*12)고람(考覽): 상고(詳考)하여 살펴봄

 

 

<남강서원(南岡書院) 중건기(重建記)>

 

함안(咸安)의 남강서원(南岡書院)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에 구국(救國)의 명장(名將)으로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정이품(正二品)라는 벼슬을 지낸 충열공(忠烈公)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남강서원(南岡書院)은 본시(本是) 1842年: 헌종8年(憲宗)에 창건(創建)된 남강사(南岡祠)이었다. 1865年: 고종2년(高宗)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남강사(南崗祠)가 훼철(毁撤)되어 빈터로 내려오다가 광복(光復) 4년(年) 후(後)인 1948年: 무자(戊子) 사당(祠堂) 자리에 남강서당(南岡書堂)을 지었다.

 

1995年: 을해(乙亥) 6月10日 서당(書堂)을 헐고 충열사(忠烈祠)와 남강서원(南岡書院)을 건립(建立)하여 충열공(忠烈公)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계속 국비(國費)와 지방비(地方費) 지원(支援)을 받아 서원중건사업(書院重建事業)에 크게 투자(投資)하여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문(內門), 외문(外門)을 짓고 담장도 두르고 나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청(請)을 해왔다.

나는 본래(本來) 글을 지을 줄도 모르는 사람인데 다가 늙어 기억력도 안 좋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것을 여러 번 사양(辭讓) 하다가 충열공(忠烈公)을 추모(追慕)하여 삼가 기문(記文)을 짖는다.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은 함안이씨(咸安李氏)이다.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파산군(巴山君)에 봉(封)해 지신 시조(始祖) 이상(李尙)의 손자(孫子)이고, 판도사판서(判圖司判書) 이원(李源)의 아들로 1298年: 충열왕(忠烈王) 24)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내곡동 두능(杜陵)에서 태어 나시었다. 일찍이 1339年: 충숙왕(忠肅王) 8)에 어린 태자(太子) 흔(昕: 충목왕(忠穆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호위시종(護衛侍從)한 공(功)이 있어 충목왕(忠穆王)이 즉위(卽位)하자 중랑장(中郞將): 정오품(正五品)이 되고, 1353年: 공민왕(恭愍王) 2)에 대호군(大護軍: 종삼품(從三品)이 되어, 1354年: 공민왕(恭愍王) 3) 다루가치(달노화적(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 부자(父子)가 반란을 일어키자 이를 섬멸하였다.

 

1360年: 공민왕(恭愍王) 9) 1月16日 4만(萬)의 홍건적(紅巾賊)이 서북면(西北面: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에 침입하여 오자 상장군(上將軍: 정삼품(正三品)으로 풍천(豊川: 황해도(黃海道) 송화군(松禾郡)에서 대파(大破) 평정(平定)한 공(功)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의 칭호(稱號)를 받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삼품(正三品)가 되어 개선(凱旋)하여 전승개선연(戰勝凱旋宴)에서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옥띠(옥대(玉帶) 옥영(玉纓)(갓끈)을 하사(下賜)받으니, 이때 왕비(王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어찌 보물을 아끼지 않습니까?" 라고 하자 공민왕(恭愍王)이 "우리 종묘사직(宗廟社稷)이 폐허가 되지 않게 <우리 인민들을> 죽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의 공(功)인데 살을 베어 준다 해도 갚을 수 없소" 라고 말 했다.

 

1362年: 공민왕(恭愍王) 11) 1月1日 20만(萬)의 홍건적(紅巾賊)이 다시 침입하여 왕도(王都)인 개경(開京: 개성(開城)이 함락되고 나라가 위태(危殆)로울 때 도지휘사(都指揮使)로서 대파(大破)하고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하니 나라를 구(救)한 공(功)으로 동년(同年) 1月28日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정이품(正二品)가 되니, 동년(同年) 2月29日 간신(奸臣) 김용(金鏞)이 공(公)을 시기(猜忌)하여 거짓 왕명(王命)에 의하여 장군(將軍)과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를 죽이니 이른바 "고려삼원수(高麗三元帥)" 이었다.

 

장군(將軍)의 아들 중문(中文)이 겨우 10살 조금 넘어 저자 거리에서 노니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갖다 주며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편안히 자고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이방실(李芳實) 장군(將軍)의 공로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1391年: 공양왕(恭讓王) 3) 3月17日 전의시승(典醫寺丞) 중랑장(中郞將) 방사량(房士良)의 상소(上疏)로 신원복관(伸寃復官)되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일품(從一品)로 추증(追增)되고 충열(忠烈)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392年: 조선태조(朝鮮太祖) 1)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마전(麻田: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아미리(峨嵋里)에 숭의전(崇義殿)을 짓게 하고 1399年: 정종(定宗) 1)에 고려태조(高麗太祖)와 7왕(王: 혜종(惠宗),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 성종(成宗), 목종(穆宗), 현종(顯宗)을 제사(祭祀)지냈는데, 1452年: 문종(文宗) 2)에 16명공신(名功臣: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검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치려(金就礪), 조충(趙冲),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을 배향(配享)하여 매년(每年)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하고 있어 슬픔과 영광이 이렇게 뚜렷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중 남강사(南岡祠)에서의 제사(祭祀)는 후손(後孫)에게만 국한(局限)되어 사림(士林)이 지내는 제사(祭祀)에는 포함(包含)되지 않았는데 진실(眞實)로 당시(當時)에 아주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때 고을의 유림(儒林)들이 생각하기를 "장군(將軍)의 공덕(功德)이 후세(後世) 사람에게 미치고 있으니 제사(祭祀)를 지낼 의미에 부합(符合)된다.

 

이미 국가(國家)에서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는 상황인데 이번 중건사업(重建事業)을 어찌 본손(本孫)에게만 맡겨두기만 하겠는가" 하고 본손(本孫)과 함께 당국(當局)에 청(請)하여 이런 거액(巨額)의 협조(協助)를 받게 하였고, 이에 따라 사우(祠宇)도 남강사(南岡祠)에서 남강서원(南岡書院)으로 등급(等級)을 올림으로써 영원한 덕(德)을 경모(敬慕)하도록 하였고,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문(內門: 숭의문(崇義門), 외문(外門: 성경문(誠敬門)을 지어 서원(書院)으로 서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 일을 하는 데는 본손(本孫) 이진욱(李鎭郁), 이인권(李仁權)이 가장 분주히 일하였고, 사림(士林) 대표(代表)는 조광제(趙光濟)와 이현정(李鉉正)이고 본손(本孫) 이기태(李基兌), 이원수(李元洙), 이종만(李鐘萬)은 내게 와서 기문(記文)을 청(請)하였다.

 

아! 장군(將軍)은 위대한 공훈(功勳)을 세우고도 간사(奸詐)한 무리들에게 모해(謀害)되어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김용(金鏞)이 마침내 개경(開京)에서 *1)효수(梟首)된 것은 아주 통쾌한 일로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언젠가는 바른 데로 돌아갈 날이 있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복재(復齋) 이가순(李家淳) 선생(先生)은 장군(將軍)을 *2)악무목(岳武穆)에 비유(比喩)하였고, 이것은 영원(永遠)히 공명정대(公明正大)한 평가(評價)가 되고 있는데 다시 무슨 군살을 붙이겠는가 이 글을 삼가 중건기(重建記)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1999년 기묘(己卯) 1月15日

전주인(全州人) 이학용(李學鏞)이 쓰다

 

 

*1)효수(梟首): 죄인(罪人)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처형(處刑)

*2)악무목(岳武穆): 악(岳)은 중국(中國) 송(宋)나라 때의 장군(將軍) 악비(岳飛)이고, 무목(武穆)은 그의 시호(諡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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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忠烈祠)

   *3世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충렬(忠烈) 휘방실(諱芳實)의 사우(祠宇)

   *소재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소포5길 82 남강서원(南岡書院)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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